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영국령 홍콩 (문단 편집) === [[영국]]의 [[점령]] === [[영국]]은 [[청나라]]와의 교역을 계속 시도했으며 결국 [[영국 동인도 회사]]가 [[건륭제]] 이후 [[광저우]]에 무역항인 공행을 설치한 후 무역을 해나갔지만 영국의 무역적자가 심화되자 [[마약]]인 [[아편]]을 팔아서[* 아편은 당시 최대 식민지인 [[영국 동인도 회사령 인도]], 정확히는 [[파키스탄]], [[아프가니스탄]] 일대에서 재배한 것이었다.] 이득을 올리기 시작했다. 그래서 중국인들의 아편 중독이 심각해지자 [[1839년]] 청나라 조정의 승인으로 [[임칙서]]가 아편 수입을 금지했고 영국은 여기에서 빌미를 잡아 중국을 공격해 [[청나라]]와 [[영국]] 간 [[제1차 아편전쟁]]이 발발해 [[1841년]] 광저우 남쪽의 작은 어촌이던 [[홍콩 섬]]이 [[영국 해군]]에 의해 함락당했다. 당시 [[영국 해병대]]가 당시에는 광둥성 신안현(新安縣)[* 지금의 [[선전시]].]의 부속 도서였던 현재의 [[홍콩 섬]] 북단에 상륙, 이렇다 할 방어병력도 주민도 없던 무주지인 이 섬을 처음 점령한 후 빅토리아 시티(Victoria City)[* '빅토리아 여왕의 도시'라는 뜻이다.]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현재의 센트럴이 그 곳이다. 이후 [[1842년]]에 체결된 [[난징 조약]]에서 아편전쟁의 전리품으로 정식으로 [[영국]]에 [[할양|양도된다]]. 그리고 그 다음 해인 [[1843년]]에는 영국은 빅토리아 시티를 건립할 겸 홍콩 총독부를 홍콩 섬 센트럴에 신설한다. 홍콩 총독부 시스템이 자리잡은 이후에 홍콩 총독은 영국으로부터 홍콩을 통치할 권리를 인정받은 홍콩 최고위 통치자로서 권력을 행사했고, 행정 부분은 비선출직 [[각료]]들과 경력직 [[관료]]들에 의해 집행되었다. 애로호 사건으로 [[영국]]이 [[프랑스]]와 합세해 [[청나라]]를 두들겨 팬 뒤 [[1860년]]에 체결된 [[베이징 조약]]으로 육지 부분인 [[구룡반도]]가 영속적으로 영국에 [[할양|귀속된다]]. 처음 베이징 조약에서는 구룡반도 남단과 스톤커터 섬이 할양되었는데 이 구룡반도 남단이 [[한국인]] 비중이 제일 높은 [[침사추이]]와 그 이웃 동네인 야우마테이, 몽콕, 홍함이었다. 그리고 더 나아가 영국의 육지부분 귀속은 지속되어 [[1898년]]에는 영국은 홍콩과 인접한 북부 섬과 신 행정구역으로 알려진 [[신계(홍콩)|신계]]를 99년 간 [[조차지|조차]]받았다. 이때 신계는 초록택시가 운행하는 현 중국 국경 지대와 구룡반도 북쪽 신구룡을 포함하는 곳으로 이 곳과 구시가지의 경계가 바운더리 스트리트이다. 이후 신계 남부 카이탁에 [[홍콩 카이탁 국제공항]]을 세워서 사실상 이 지역의 조차 협약을 [[사문화]]하고 신계 북부 중국 국경지대만을 반환 대상으로 봐서 택시 색을 신구룡과 다른 초록색으로 지정하고 황무지로 남긴다. [[19세기]]에 홍콩은 '''영국의 주요 무역항'''이 되었고 홍콩은 영국의 물산 집산지로서 활용되는 '''자유무역항''' 및 '''[[중국]]으로의 [[관문]]'''으로 선언되었다.[* 자유무역항 기능은 훗날 [[싱가포르]]가 [[독립]]하자 여기 넘겨준 지 오래고 [[싱가포르]]도 [[두바이]], [[도하]] 등 [[아라비아 반도]]에 차츰 넘겨주고 있다. 중국으로의 관문만은 그 누구도 대체불가라 현재도 잘 활용중이며 오히려 중국의 급성장으로 더 역할이 중요해지고 있는 중이다.] 이 때 구룡반도-광둥성 광저우 간 [[동철선|철도]]가 개통되었으며 또한 [[영국 학제|영국식 교육 시스템]]이 도입되었다. [[1870년대]]~[[1880년대]] 이후 홍콩은 [[아시아]]의 영국령 중에서 가장 빅토리아 문화가 발달한 지역이 되었다. 그리고 영국의 지배를 받는다는 점에 있어 중국 국내 세력의 손길이 미치기 어려웠기 때문에 [[군벌/중화민국|군벌]]이고 혁명당원들이고 궁지에 몰리면 홍콩으로 다들 [[망명]]하곤 했다. [[쑨원]]만 해도 멸만흥한 운동을 할 때 [[청나라]] [[팔기군]]의 추적 및 청조의 핍박을 피해 [[미국]]의 [[하와이]]와 영국 영토 홍콩에 와 있었다가 [[1911년]] [[신해혁명]]으로 [[만주족]]의 청조를 멸망시키고 [[한족]]의 민주주의 공화국인 [[중화민국]]을 세운다. 이 과정에서 홍콩 역시 [[중국사]]의 소용돌이 속에 휩쓸려서 [[1922년 홍콩 선원 파업]]과 1925년의 [[5.30 운동]] 등 중국의 정치적 격변에 수차례 휩쓸리기도 했다. 또한 중국 내부의 [[혁명]]을 저지하기 위한 영국의 기지 역할도 하여서 [[영풍함 사건]], [[광저우 상단 사건]] 등의 사주에 개입되기도 했다. [[태평양 전쟁]]이 터진 [[1941년]] [[12월 8일]]에는 [[일본 제국]]이 홍콩을 침공했다. [[영국군]]은 17일 동안 맹렬한 방어전을 벌였지만, [[크리스마스]]가 되자 방어 병력을 물리친 [[일본군]]은 성 스테판 병원에서 치료 중인 부상병들과 의료인들까지 몰살하고 [[홍콩일치시기|군정]]을 시행했다. 이 때 [[중일전쟁]]에 대한 분풀이 등의 이유로 중국계 홍콩인에 대한 학살이 일어나기도 했다. [[홍콩 경찰]]과 [[홍콩 소방처]]는 해산되고 그 자리는 [[일본 제국 육군]] [[일본 제국 육군/헌병|헌병]]들이 차지했으며 일본 육군 [[헌병]]들은 [[영국인]]에게만 허용되던 [[스타페리]]와 [[홍콩 트램]] 2층에 앉는 등 위세를 부리고 시민들을 위협하기 일쑤였다. 이 땐 영국계 홍콩인 백인들도 일본군의 눈치를 보고 다녔다. [[일본군]]이 뿌린 낮은 가치의 군표는 [[홍콩 달러]]의 기능을 대체했는지라 홍콩의 경제 마비까지 초래했다. 그런 과정에서 [[중국인]]들은 [[중화민국군]]과 연계해 항일 [[게릴라]]를 조직해 저항하기도 했으며 영국군은 [[호주]]로 후퇴한 후 [[미군]]과 함께 [[동남아시아]]를 탈환하고자 여러 격전을 치르고 그 과정에서 차츰 [[미얀마]], [[방글라데시]] 등을 탈환하기 시작했다. 그러나 아직 홍콩 전선은 탈환하지는 못했다. 미국도 [[필리핀 제2공화국|필리핀]]을 겨우 탈환했기 때문에 [[미군]]에 비해 수적으로 밀리는 영국군은 별 수 없었다. 결국 [[1945년]] [[8월 15일]]에 [[일본 제국]]이 패망하면서 영국은 홍콩을 수복했고, 특별군사법정을 열어 일본군에 부역한 [[중국인]]들과 홍콩에서 전쟁 범죄를 자행한 [[일본인]]들을 처벌했다. 이 때 [[중국인]] 5명이 [[교수형]]에 처해졌으며 22명이 투옥되었다. [[일본인]]들은 21명에게 [[사형]]이, 85명에게 [[징역형]]이 선고되었다. 그 외에는 도주하거나 무죄방면되었으며 추가적인 기소는 없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